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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애완동물 안타까운 현실... 문상철칼럼 世上萬事

문상철칼럼 世上萬事, 작은 애완동물의 비애(悲哀)

애완동물에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나들이 또한 함께한다.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유기된 애완동물들이 넘쳐나는 곳이 우리나라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이런 반대적 사회현상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즉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다가 싫으면 버리면 된다는 인식이 문제인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 부산 출장 중 한 식당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작은 새의 비참한 삶이었다. 차마 사진으로 올릴 수가 없는 현장, 물통은 변과 털, 먼지 등으로 범벅이고, 햇볕을 한 번도 못 본 새는 눈을 껌벅이며 비실비실 하고 있었다. 주인장을 불러 새를 이런 식으로 보살피고 키울 것이면 아예 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을 건내 보았다. 기분이 나빴는지 직원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 신경 쓸 바 아니라며 말을 딱 잘랐다. 인상을 보니 당신이 뭔데 내가 키우는 새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느냐 하는 눈치였다. 하기사 필자가 관여 할 바는 아니지만 애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비록 새라지만 고귀한 생명과 삶의 가치는 비슷할 것이다. 애조문화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들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한편에는 많은 반려동물들이 학대 아닌 학대당하고 있다고 본다. 현실의 깊이를 더해 갈수록 사랑스럽고 예쁜 반려동물들은 생활방식에 따라 자유로움이 뒤 바뀌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반려동물들에게 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가지 책임을 못 질것이면 아예 소유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저 호기심이나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껴 충동적 구매 후 사랑과 애정이 결핍된 상황에서 키우는 것은 항상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좋아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주변에서 선물로 받아 키우는 경우다. 그러다보니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관심 없는 방치는 학대보다 더 참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반려동물은 어디까지나 동반자로 가족과 함께 끝가지 생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진정한 의미가 부여된다.

물론 나라마다 관습, 생활 및 문화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름대로 동물의 복지, 보호, 학대방지 관계법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분야에서 사용되는 동물의 복지는 동물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관련된 문제가 있다는 관점에서 취급된다. 비록 그 수는 적다고 하더라도 반(反)동물체 실험자들은 인류나 동물에서 실험적인 이점이 있지만, 인간이 동물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실험이라도 동물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회나 국가는 없고 누구도 실험영역에서 동물의 사용을 전적으로 금지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동물보호법이 선진화 되어 있는 미국은 1873년 동물복지법을 만들어 사람들의 동물을 취급하는 방법과 비록 사람의 식용으로 희생되는 동물일지라도 수송과정에 사료, 물, 휴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28시간을 초과하지 않고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법률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이밖에도 캐나다는 1961년, 독일은 1972년, 일본은 1973년, 프랑스는 1974년, 스위스는 1978년에 각각 동물학대방지 및 동물복지법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1년 5월 31일 법률 제4379호로 동물보호법을 제정 ·공포하여 동물학대를 금하고 동물을 적정하게 보호 ·관리하도록 시행하고 있다.

 

현행 동물보호법 제6조 2항에 의하면 ‘소유자 등은 동물이 질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경우에는 신속한 치료 그 밖에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그 수준이 ‘권고’에 그치는 것이어서 유명무실한  동물보호법의 강제성 강화 필요성이 또 다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동물방치는 소극적?간접적인 동물학대의 한 형태로 직접적인 학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처벌 기준을 정하기가 애매하다. 이런 점을 악용해 더욱 잔인하고 교묘한 형태의 학대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때 프랑스의 모 배우가 우리 국민들이 먹는 보신탕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었다. 우리는 당시 보신탕을 먹건 안 먹건 남의 나라 음식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역공을 퍼부었다. 그런데 보신탕은 차치하도라도 사소한 반려동물까지 유기하고 학대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반박을 해야 할 지 답답한 마음이다. 끝까지 보살피지 못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부산의 한 작은 식당에서 마주한 새의 처참한 모습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해본다. 지금도 길거리에는 주인들로부터 버림 받은 반려동물들이 마지막 남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문상철칼럼 世上萬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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